진행
저택 안의 공기가 싸늘했다. 익숙한 공간임에도 발을 디딜 때마다 낯선 공간인 것처럼 느껴졌다.
진행
불이 꺼진 복도와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조용히 숨을 고르며 2층으로 향했다.
진행
계단을 오를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공허하게 퍼졌다. 발소리가 이렇게 크게 울리는 집이었나, 소리가 닿는 곳마다 기시감이 일었다.
진행
2층 복도를 따라 걷던 안토니오는 문이 반쯤 열린 방 앞에서 멈춰섰다.
진행
문 틈으로 바닥에 어지럽게 나뒹구는 물건들이 눈에 띄었다.
진행
그는 어둠 속을 응시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적막 속에서 짧은 숨소리가 들렸다.
진행
닫혀있는 문을 밀어 열었다. 복도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방 안까지 비췄다.
진행
어질러진 물건들 사이 적나라한 핏자국이 보였다. 짧은 숨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렸다.
진행
소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빛이 들지 않는 방 한 쪽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진행
안토니오는 망설이지 않고 다가갔다. 웅크린 몸이 잘게 떨고 있었다.
안토니오
에밀.
진행
낮은 목소리에 작은 몸이 움찔했다.
진행
안토니오가 손을 내밀자 떨리는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잡은 손은 차가웠다.
진행
천천히 고개를 든 에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눈가가 붉었고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남아있다.
진행
입술이 떨리다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에밀
형…어,어쩌지…?
진행
맞닿은 손바닥이 축축했다. 에밀의 손이 미끄러졌다.
진행
안토니오는 에밀의 손과 옷에 묻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진행
03:: 하지(夏至)
진행
**열흘 전**
진행
햇빛이 창문을 통해 밝게 쏟아졌다. 높은 천장, 반듯하게 정렬된 좌석, 목재 책상과 희미한 종이 냄새. 법정 안은 그것들을 짓누르는 긴장감이 이어졌다.
안토니오
지난 달 14일, 피고인 리오넬 에스칸테는 사무실에서 피해자 베르너 하임을 총기로 살해했습니다.
진행
법정 스크린에 현장 사진이 띄워졌다. 핏물이 번진 카펫과 쏟아진 서류들.그 위로 쓰러진 피해자의 시신과 시신에서 발견된 총알.
안토니오
총알은 피해자의 심장과 복부에서 발견되었으며, 다른 직원들의 신고로 즉시 체포되었습니다.
진행
변호인은 피고가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아왔다는 점을 강조하며 변론했다.
진행
피고는 증인석에서 발언을 시작했다.
피고
그 사람은, 날 매일 불렀어요. 퇴근 후에도 전화하기도 하고, 새벽에도.
피고
그러면 그날은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출근하면 또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숨도 못 쉬게 만들었어요.
피고
내가 뭘 해도 부족하고.어리석고, 쓸모가 없고 그냥…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렇게 몇 년을…
진행
그의 숨이 불규칙하게 흔들렸고 눈가가 벌겋게 물들었다.
피고
그날도 그랬어요. 네가 문제라고, 너 때문에…
진행
안토니오는 느릿하게 손을 움직이며 파일을 정리했다. 그러는 중에도 시선은 피고인에게서 단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았다.
진행
변호인의 신문이 끝나고, 안토니오가 피고인의 앞에 섰다.
안토니오
사건 당시 목숨에 위협을 받으셨습니까?
피고
무슨 뜻이죠?
안토니오
발포를 하지 않았다면 에스칸테 씨가 죽게 될 상황이었나요?
진행
피고인은 입을 닫았다.
안토니오
예를 들겠습니다. 하임 씨가 무기로 위협하던 상황이었습니까?
피고
…아니요.
안토니오
비무장 상태인 상대를 향해 총을 발포하신 게 맞습니까?
피고
네, 하지만…
안토니오
질문을 마칩니다.
진행
**
진행
재판장에서 나온 안토니오는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저녁 노을이 붉게 번지는 검찰청 복도는 조용했다.
진행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사관 몇 명이 이미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컴퓨터를 끄고 서류를 정리하며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렸다.
검찰수사관 1
오늘도 마지막까지 남으십니까, 검사님?
진행
한 수사관이 짐을 챙기며 안토니오를 향해 웃었다. 안토니오는 짧게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안토니오
네. 먼저들 들어가세요.
검찰수사관 2
너무 늦게까지 남지 마세요.
검찰수사관 3
수고하십시오, 검사님.
진행
하나 둘 인사를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다. 문이 닫히자 실내는 더욱 고요해졌다.
진행
안토니오는 천천히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재판 내용을 다시 정리하고, 새로 수집한 증거목록을 정독하고, 앞으로의 재판 일정을 확인하며 섞인 사건 파일들을 다시 정렬했다.
진행
손끝이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모든 과정은 깔끔했다.
어느 정도 마무리를 한 뒤 퇴근할 채비를 했다. 책상 위의 시계는 이미 7시를 넘은지 한참이었다.
진행
책상에서 일어날 때 진동음이 낮게 울렸다. 책상 한 쪽에 둔 휴대폰이 조용히 떨리고 있었다. 안토니오는 화면의 이름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진행
노을이 완전히 지고, 가로등 불빛이 도로 위를 밝히기 시작했다.
진행
안토니오는 길가에 차를 세운 채 가만히 바깥을 응시했다. 똑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며 지나갔다.
진행
잠시 후, 인파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진행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안토니오의 차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마임
고마워, 형.
진행
차 문이 닫혔다. 안토니오는 안전벨트를 매는 마임을 힐끗 보며 무심하게 물었다.
안토니오
무슨 일 있어?
마임
아니. 그냥 오랜만에 형 보고 싶어서. 집에 안 온 지도 꽤 됐잖아.
진행
안토니오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진행
도로 위로 차가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차창 너머로 네온사인이 번져있었다.
진행
마임은 창밖을 바라보다 떠오른듯 가볍게 말을 꺼냈다.
마임
교수님들이 가끔 형 이야기 해.
안토니오
내 이야기?
마임
인턴 프로그램 사건 분석을 했거든. 형이 냈던 의견이었다면서.
안토니오
…그걸 자료로 써?
마임
자주. 그리고 그 기수에서 사건이 제일 다양했다고도 하셨어.
안토니오
절반이 성적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안 했나보네.
마임
형은 그 반대쪽 절반이고?
진행
마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안토니오는 으쓱이며 핸들을 돌렸다.
진행
평소처럼 가벼운 표정이었고 특별히 이상한 점도 없었다. 마임이 먼저 말을 꺼내고, 사소한 일상을 말하는 모습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진행
그러나 처음 전화를 받을 때 느낀 위화감이 사라지진 않았다.
진행
평범한 대화가 오가며 차는 저택에 들어섰다. 차가 완전히 멈추자 마임이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내렸다.
마임
데려다줘서 고마워.
진행
창문마다 환한 불빛이 새어 나왔고, 대문을 지나 현관을 들어서자 익숙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마임
저 왔어요!
진행
마임이 익숙하게 외쳤다. 그에 대답하듯 거실에서 작은 소란이 들렸다. 곧이어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에밀
왔어?
진행
에밀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다 문 앞에 서 있는 안토니오를 보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에밀
형!
진행
놀란 얼굴은 금세 웃음으로 바뀌었다.
진행
에밀은 망설임 없이 안토니오에게 다가왔다.
에밀
진짜 오랜만이야, 형이 집에 오다니.
안토니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닌데.
에밀
놀라지! 바빠서 연락도 못하면서.
진행
에밀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안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다가왔다.
삼촌
안토니오가 왔다고?
안토니오
오랜만이네요. 삼촌.
진행
걸어나온 사람은 이 집의 가사도우미이자,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온 사람이다. 벌써 이십 년 이상 이어진 관계로, 그를 삼촌이라 불렀다.
삼촌
안 그래도 뉴스 나오는 거 봤지. 그래도 얼굴 보니 좋네.
진행
삼촌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안토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
어느새 에밀과 마임은 소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토니오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진행
집안은 깔끔했고 곳곳에 신경쓰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모든 것이 평범했다.
안토니오
요즘도 자주 오세요?
삼촌
요즘은 사흘에 한 번 정도. 애들도 다 컸다고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
안토니오
다른 문젠 없고요?
삼촌
일단은. 상태가 많이 좋아졌어.
진행
대화를 하다 문득테이블 옆에 놓인 약 봉투가 시야에 들어왔다. 안토니오는 의식적으로 그곳에 시선을 멈췄다.
진행
적지 않은 양의 약 봉투는 날짜별로 정리 되어있었다.
진행
거실에선 가벼운 농담과 대화 속에 웃음소리가 섞여들려왔다.
진행
평범해보였다. 일단은.
진행
안토니오는 이 흐름에 맞춰 조용히 응하기로 했다.
진행
**
진행
식사를 마친 뒤 다시 거실에 모여 앉았다. 저녁 공기는 한결 차분해졌고, 탁자 위로 따뜻한 차 한 잔씩이 놓여있었다.
진행
에밀이 찻잔을 손에 감싸쥐며 말을 꺼냈다.
에밀
낮에 누나랑 통화했어.
마임
일 생긴 거 끝난 거야?
에밀
거의 그런 것 같아. 먼저 전화가 왔거든, 예전엔 내가 해도 잘 못받았는데.
진행
마임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메르세데스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안토니오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올렸다.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굳이 끼어들지는 않았다.
진행
대화는 한동안 이어졌다.
진행
집안일을 정리한 삼촌도 그의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안토니오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곤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안토니오
나도 이만 가볼게.
에밀
아, 내일도 일 하겠네.
안토니오
그렇지.
진행
안토니오가 짧게 대답하자, 에밀은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며 웃었다.
에밀
형 바쁜 거 알지, 다음에 또 와.
마임
벌써 가?
진행
짧은 문장에 단순히 아쉬움과는 미묘하게 다른 감정이 섞여있었다. 마임은 조금은 당황한듯한 얼굴로 안토니오를 바라봤다.
안토니오
내일 오전에 재판이 있어.
진행
그 말에 마임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마임
그렇구나. 알았어.
진행
**
진행
마임은 안토니오를 따라 나왔다.
진행
밤공기가 불어왔다. 옅은 조명에 안토니오의 차가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진행
차에 오르기 전, 안토니오는 옆에 선 마임을 가만히 보았다. 여전히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진행
그는 잠시 생각하다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안토니오
무슨 일 있으면 오늘처럼 연락해.
진행
마임이 짧게 눈을 깜빡였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임
알았어. 그러니까 형도 너무 바쁘게 지내지 마.
진행
안토니오는 대답하지 않고 차 문을 열었다. 몇 초 뒤 차가 도로를 따라 멀어졌다.
진행
마임은 시야에서 차가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봤다. 테일라이트가 점점 작아지다 완전히 밤 속으로 사라졌다.
진행
차 안은 조용했다. 라디오도 켜지 않아 도로 위를 달리는 엔진 소리만이 은은하게 들렸다.
진행
안토니오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창문을 살짝 내렸다.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진행
짧은 시간 본 집 안의 모습이 무작위로 머릿속을 스쳤다.
진행
그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문득 느껴진 어색함의 출처를 알 수 없었다. 굳이 캐묻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진행
괜찮은가?
진행
괜찮아보였다. 일단은.
진행
안토니오는 창문을 다시 올렸다. 차는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진행
정규 수업이 끝난 오후, 마임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진행
건물의 유리창에 반사되는 햇빛은 부드럽고 평화로웠다. 많지 않은 학생들 속에서 마임은 미세하게 굳은 자세로 걸음을 옮겼다.
진행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 유리 벽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순간 그는 멈춰섰다.
진행
셔츠 단추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조금 느슨해보이는 넥타이도 틀어짐 없이 곧게 매만졌고, 셔츠 소매까지 손끝으로 반듯하게 정돈했다.
진행
동작은 자연스럽게 반복되었지만 그 손끝에는 무의식적인 강박이 배어 있었다.
진행
조용한 도서관의 한켠에서 그는 자료를 꺼내 책상 위로 펼쳤다.
진행
사건과 재판 기록들이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진행
마임은 수십만 자의 글자 속에서 익숙한 이름을 단번에 찾았다.
진행
‘안토니오’. 사건 담당 검사의 이름이었다.
진행
익숙한 글자가 활자체로 새겨져 있는 것 뿐인데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진행
자세를 잡고 앉아 자료를 읽어내려갔다. 금방 피고인의 진술이 등장했다.
진행
‘그 사람은 늘 원하는 게 있었어요. 그걸 어떻게든 해내길 원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진행
자료를 눈으로 천천히 훑다가 한 곳에서 멈췄다. 손끝이 종이의 가장자리를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진행
여전히 도서관의 조명은 따듯했고 공기는 차분했으나 마임의 눈은 천천히 흔들렸다.
진행
‘의뢰인의 증언과 의뢰인이 지난 2년간 기록해온 일기가 있습니다.’
진행
‘모두 주관적인 글입니다. 피해자의 학대 혐의 주장을 증언에서 제외해주시길 바랍니다.’
진행
그저 인쇄된 글씨일 뿐이었음에도 마임은 자신의 형 목소리를 떠올렸다.
진행
언제나 차분하고 이성적인, 무미건조한 말투의.
진행
맞는 말이었다. 냉정했고, 법적으로 타당했다. 모든 주관적인 증언은 입증될 수 없다.
진행
그저 글자의 나열일 뿐이다. 그런데도 의아할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문장이 눈에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지길 바랐다.
진행
조금 전 유리창 앞에서 셔츠 주름 하나 마저도 집착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얼 원하는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이 불명의 감정을 털어낼 곳이 필요했다.
진행
**
??
중위님, 추가 보고서입니다.
메르세데스 비센티
확인하고 전달해.
진행
군사 기지 내부는 쉴틈없이 분주했다. 누군가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고, 누군가는 서류더미를 들고 복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진행
차가운 철제 문이 열릴 때마다 무거운 발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인 소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진행
메르세데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복도를 걸었다. 빠르게 이동하며 한 손에 든 태블릿 화면을 눈으로 읊었다. 현장 보고서와 분석 자료가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다.
??
연결 안 되나요?
??
통신 두절, 확인 중입니다.
??
잔해 분석 결과는 언제 나오죠?
??
최대한 빠르게 처리 중입니다.
진행
복도를 지나는 내내 사방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행
눈 앞의 글자도 소리와 함께 울리는 것 같았다. 잠깐 머리를 식힐 생각으로 창가 근처에 서서 태블릿을 내렸다.
진행
유감스럽게도 평화는 몇 초도 이어지지 않았다.
진행
주머니 속에서 작은 진동이 울렸다. 한숨은 나왔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메르세데스는 화면을 보지도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메르세데스 비센티
전화 받았습니다.
마임
누나, 나야.
진행
그녀는 반사적으로 화면을 내려다봤다. 굳이 이름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건 예상치 못한 연락에 대한 의아함이었다.
진행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휴대폰을 다시 귀에 가져갔다.
메르세데스 비센티
무슨 일 났어?
마임
아니, 그건 아닌데…, 바쁘면 그냥 끊어도 돼. 괜찮아.
메르세데스 비센티
먼저 끊으면 너 삐지잖아.
마임
…그런 적 없는데.
메르세데스 비센티
있거든.
진행
잠시 정적이 흐르다 마임이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임
아버지는? 잘 계셔?
메르세데스 비센티
나도 못 뵌지 좀 됐어. 서로 바쁜 거 잘 아는데 별 소식 없는 게 낫지.
마임
아, 그럼 이번에도 못 오는 거야?
메르세데스 비센티
뭘…아.
진행
메르세데스는 조용히 남은 날짜를 되뇌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가족 행사를 잊은 것은 아니나 날짜가 흐르는 감각도 없이 근무에 집중해왔다.
진행
이제는 가야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메르세데스 비센티
너 거기 갈 거야?
마임
안 갈건데.…아마.
메르세데스 비센티
'아마'는 안 돼, 가면 뭔 소리 들을지 알면서 뭘 가.
마임
알아. 근데 형이랑 누나는 늘 갔었잖아.
진행
순간 복도를 타고 누군가의 고함 섞인 명령 소리가 들려왔다. 메르세데스는 슬쩍 흘겨보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메르세데스 비센티
그게 뭐?
마임
형도 이번엔 바쁘고…
메르세데스 비센티
네가 신경쓸 일 아니야. 가지마. 갈 필요 없어.
진행
단호한 목소리에 마임은 입을 닫았다. 휴대폰 너머에서 간간히 옅은 숨소리만 들려왔다.
진행
어떤 얼굴일지 짐작이 갔다. 메르세데스는 느리게 눈을 감으며 다시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메르세데스 비센티
에밀은 요즘 어때?
마임
괜찮아. 외출 횟수도 좀 늘었고,…연락 하지 않았어?
메르세데스 비센티
했어. 그냥 옆에서 보는 사람 입장에선 어떤가 싶어서.
마임
약도 잘 먹고 있으니까. 괜찮아, 별 일 없어.
메르세데스 비센티
그래도 너 있어서 다행이네.
진행
메르세데스가 무언가 더 말하려던 찰나, 기지 건물 안쪽에서 큰 굉음이 들려왔다.
진행
누군가 소리쳤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전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메르세데스 비센티
미안,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진행
대답할 틈도 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진행
전화가 끊어진 뒤로도 마임은 한참동안 휴대폰을 귀에서 떨어뜨리지 못했다.
진행
막상 하려던 말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이번에도 묻혔다.
진행
그러고 보면 그녀는 마임이 아카데미 가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게 나은 일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일자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어쩌면 쓸데없이 시간을 뺏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진행
그는 그렇게 꺼내지 못한 말을 한숨과 함께 삼켰다.
진행
**
진행
해는 지평선 아래로 사라진지 오래고 집 앞 가로등이 줄 지어 켜져 있었다.
진행
간신히 앞이 보일 정도로 옅은 조명만이 켜져있는 현관 앞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평소보다도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
진행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자, 조용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마임을 맞았다.
진행
에밀이었다.
진행
거실을 가로질러 달려온 그는 마임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눈에 띄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에밀
연락 안 돼서 놀랐어,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진행
낮고 조용한 목소리의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임은 서둘러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진행
꺼진 화면은 전원 버튼을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마임
미안해. 꺼진 줄 몰랐어.
진행
그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조용히 대답했다.
진행
에밀은 대답 대신 마임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의 눈에는 너무 많은 상상을 겪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마임
미리 연락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
에밀
괜찮아, …이제 괜찮아졌어.
진행
그 말은 안심하라는 말 같기도,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는 말 같기도 했다.
진행
문득 마임은 전자음이 섞인 메르세데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진행
‘그래도 너 있어서 다행이네.’
진행
귓가에서 목소리가 계속 반복해서 들려왔다.
진행
예전은 몰라도 지금, 마임은 그와 가장 가까운 유일한 사람이다. 본인의 행동이 그에게 어떤 파장을 줄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진행
마임은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가 잠수하듯 호흡을 멈췄다. 목이 졸리는 듯한 환각을 느꼈다.
에밀
그래도 다음엔 문자라도 남겨줘.
진행
에밀은 마임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 옅게 웃어보였다. 그에 맞춰 마임도 미소를 지어보였다.
진행
에밀의 안정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죄책감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진행
**
진행
방 문이 닫히고나서야 마임은 수면 위로 겨우 떠오른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진행
닫힌 문에 기대어 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가만히 있었다.
마임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진행
속삭이듯 중얼이며, 그는 이마를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두통같은 묵직함이 천천히 뒷목을 짓눌렀다.
진행
괜찮다.
진행
강박에 가까운 다독임이었다. 위안보다는 명령에 가까운 말이었다.
진행
호흡이 안정되자 방 안의 고요가 느껴졌다. 불 켜는 것조차 잊어 캄캄한 방 안을 보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진행
남은 감정을 마저 가라앉히려면 물이라도 마셔야할 것 같았다. 마임은 숨을 고르고 닫았던 방 문을 다시 열었다.
진행
듬성듬성 옅은 조명이 켜진 복도를 따라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다.
진행
발끝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마저 신경쓰며 걸음을 옮기던 때, 현관 쪽에서 기척과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행
마임은 걸음을 멈추고 소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리니얼 비센티
안 자고 있었구나.
진행
피로가 녹아든 나직한 음색이었다.
마임
과제가 남아서요.
진행
마임은 언제나처럼 예의 바르고 맑은 말투로 대답했다.
진행
리니얼은 그런 마임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손길이 머리카락 위를 조심스레 스쳤다.
리니얼 비센티
무리하지 말고, 너무 늦기 전에 자도록 해.
마임
네, 어머니도 좋은 밤 되세요.
진행
리니얼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았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다시 마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리니얼 비센티
이번 모임엔 안 가도 돼.
마임
…정말요?
리니얼 비센티
다들 바쁠 시기잖아, 너도 그렇고. 괜히 신경쓰이게 한 것 같네.
진행
마임은 잠시 말을 잃었다.
진행
몇 시간 전의 전화를 떠올렸다. 누나가 전한 것일까?
진행
상관없었다. 당장 눈앞의 일이 하나라도 줄었으면 그걸로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임
…네. 감사해요.
진행
마임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등을 돌렸다.
진행
그녀의 뒷모습이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마임은 조용히 물을 따라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흐르자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진행
괜찮은 것 같았다.
진행
컵을 내려놓자 시선이 약 봉투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눈에 띄게 수가 줄어 있었다.
진행
그는 조금 전의 에밀의 모습을 떠올렸다. 고작 수십분 전의 일인데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진행
에밀은 나아지려 하고 있다.
진행
그러니 나만 잘하면 될 일이다.
진행
괜찮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방으로 돌아갔다.
진행
강의실은 평소보다 들뜬 분위기였다.
진행
늦은 오후의 수업 시간, 교수는 사건 판결문 일부를 띄워 놓고 말했다.
교수
오전에 재판 결과가 나왔죠. 다들 예상했던대로 유죄가 나왔습니다.
진행
재판이 진행됨과 동시에 과제와 자유토론 등 수업 내용으로 쓰였던 사건이다. 그만큼 학생들 사이에 긴장감이 높던 사건이기에 마치 스포츠 경기라도 끝난 듯한 반응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교수
이번 사건에서 변호인은 피고의 정신 상태를 강조했지만 왜 감경 사유로 인정되지 않았을까요?
진행
몇몇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교수의 시선이 마임을 향했다. 익숙한 반응처럼 주변 학생들의 눈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마임
정신적 고통은 감경 요소가 될 수 있으나, 이번 사례에서는 객관적 증거가 부족했습니다.
마임
피고인의 진술 외에 이를 뒷받침할 진료 혹은 신고 기록, 제3자의 증언이 없었고 범행 수단과 준비 과정에서 계획성이 인정되므로 심리적 압박은 정당한 근거로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교수
정리 잘했네요. 형 가까이에서 잘 배운 게 보여요.
진행
교수는 판결문 구절을 읊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학생들은 각자의 노트에 적으며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
다시 자리에 앉은 마임의 왼손은 조용히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끝이 하얗게 굳었으며 옷에 손톱자국이 남았다.
진행
입을 다물고 한참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자각했다.
진행
옆자리에서 한 학생이 슬쩍 마임에게 속삭였다.
학생1
저 교수님 너만 보면 너희 형 이야기 하더라.
마임
그러게.
학생1
아무튼 실적 하나 더 쌓으셨네. 축하해.
진행
마임은 짧게 웃었다.
진행
대답은 자연스럽고 목소리도 흔들림 없었다.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펜 심이 부러졌을 뿐이었다.
진행
그는 조용히 펜을 내려놓고 책상 위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객관적 증거와 기록, 심리적 압박, 증명…
진행
증명되지 못한 고통은 없던 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진행
순간 그는 자신이 내뱉었던 답을 반박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이게 충동이 아니라, 이미 속에서 몇 번이고 조립되고 해부되길 반복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행
**
진행
안토니오는 차에서 대충 짐을 꺼내 한 손에 들었다.
진행
평소보다 퇴근이 늦은 날이었다. 해는 이미 졌지만 초여름의 공기는 따뜻했다.
진행
집까지는 몇 분도 걸리지 않을 만큼 짧은 거리였다. 그의 움직임을 인식한 센서가 그의 앞으로 불을 밝혔다.
진행
마지막 조명이 켜지자 그의 발 앞으로 그림자가 졌다.
진행
계단 아래 차분히 앉아있는 마임과 눈이 마주쳤다.
마임
오늘은 좀 늦었네.
진행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말투였으나 안토니오는 얼마 전 느낀 위화감을 떠올렸다. 그때와 똑같은 공기가 맴돌았다.
진행
그리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억지로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안토니오
들어가자.
진행
마임이 조용히 일어서 익숙하게 현관으로 들어섰다.
진행
그는 낮은 테이블 옆에 가방을 두고 조심스레 소파에 앉았다. 뒤따라 들어온 안토니오는 겉옷을 벗어 걸고, 물 한 잔을 따라 마임에게 건넸다.
마임
고마워.
진행
물잔을 받아든 마임은 조용히 물을 마셨다. 안토니오는 그의 앞에 마주 앉으며 물었다.
안토니오
무슨 일 있었어?
진행
마임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가만히 유리컵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마임
재판 끝난 거 봤어. 아니, 사실 진행하는 거 다 봤거든…
마임
형이 생각했던 대로 된 것 같아?
진행
그는 마치 학생으로서 궁금한 것을 묻는 것처럼 보였다.
진행
안토니오는 정말로 그런 의도로 묻는 게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차분히 대답했다.
안토니오
변수가 몇 가지 있었지만, 대체로 그래.
마임
우발적으로 한 행동일 수 있지 않을까? 정말로 힘들어서.
안토니오
그럴지도 모르지.하지만 증명하지 못했잖아.
진행
그는 고민하지 않고 즉시 답했다.
마임
그런 거 말고…형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안토니오
상관없어.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안토니오
압박을 받는다고 누구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아.
진행
안토니오의 말은 담담했다. 어떤 억양도 없어 오히려 무게가 느껴졌다.
진행
마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은 진실 뿐이었다.
진행
법률은 사회의 자명한 약속이고 이건 법적으로 ‘옳은 말’이다.
진행
왜 지금껏 답답함과 불편함을 느껴왔는지, 왜 정답을 뱉는데에도 찝찝함을 느껴왔는지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 옳은 말을 알고는 있어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진행
마임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야기를 잘 꺼낼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걱정이 들었다. 자신이 이걸 납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될까봐 겁이 났다.
마임
미안. 안 그래도 늦게 왔는데 너무 오래 있었네.
진행
마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지만 움직임엔 조급함이 묻어났다.
안토니오
데려다줄게.
마임
괜찮아. 금방 갈 거야.
진행
마임이 가방을 챙기며 웃었다. 이상하리만큼 익숙한 웃음이었다.
진행
마임은 안토니오가 붙잡기 전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문은 그대로 닫혔다.
진행
마임은 무언가에 쫓기듯 방 안으로 들어섰다. 돌아오던 길의 모든 게 아득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지도 알 수 없었다.
진행
괜찮은가?
진행
아니다.
진행
그랬던 것 같은 적이 있었지만 아니다.
진행
그는 자신에게 깊은 실망과 권태를 느꼈다. 다들 멀쩡히 잘 해나가는데 왜 자신만 이런 혼란을 느끼는 걸까?
진행
고개를 들자 시야에 방 안의 모든 게 들어왔다.
진행
기이하고 생경한 감각이었다. 사물 하나 구조물 하나가 모두 조잡한 모조품처럼 보였다.
진행
뭔가 이상하다.
진행
본능적으로 원인을 찾으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기이한 감각만 선명하게 이어질 뿐이었다.
진행
오른손이 움찔 떨렸다. 이윽고 팔을 타고 통증이 밀려 올라왔다.
진행
그는 천천히 손을 내려다봤다. 시야가 흔들리다 자신의 손 형태가 뚜렷하게 보였다.
진행
정확히는 손목이다. 길고 얇은 선 하나, 아니 어쩌면 여러 선이 엮여있을지도 모를 것이.
진행
마임은 천천히 방 안을 걸었다.
진행
눈을 감았다 천천히 떴다.
진행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어 문신을 문질렀다. 착각이었길 바랐으나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진행
그럼에도 그의 손가락은 계속 움직였다.
진행
조심스러웠던 움직임은 점점 거칠어졌다. 살갗이 긁힐수록 오히려 문신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진행
행위가 멈춘 것은 손톱이 살을 파고든 후였다.
진행
생채기 위로 핏방울이 맺혔다가 시간이 되감아지는 것처럼 아물었다.
진행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목엔 붉은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
진행
갑자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이다.
진행
천천히, 아주 천천히 휴대폰 화면을 내려보았다. 형이다.
진행
미약한 진동이었지만 그조차도 못 버티고 손에 힘이 풀렸다. 휴대폰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진행
뒤집힌 휴대폰은 여전히 울려댔고, 그 상태로 한참을 울리다가 멈췄다. 그걸 다시 주울 생각이 들지 않아 가만히 쳐다만 봤다.
진행
아주 잠깐 조용해졌다가, 휴대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진행
눈 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사라지길 바랐다.
진행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다 책상에 부딪혔다. 그 위에 있었을 물건들이 쏟아지며 큰 소리를 냈다. 펜 굴러가는 소리와 종이가 펄럭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이어졌다.
진행
마임은 놀라 멈춰섰다. 발치에 묵직하고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진행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진행
금속 날이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작고 날선 빛이, 눈을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행
**
진행
에밀은 조용히 책을 덮었다.
진행
갑작스러운 소음이었다. 시간은 늦었고 집 안은 대체로 늘 조용했다.
진행
지금 집에 있는 사람은 자신과 조금 전 귀가했던 마임뿐이었다. 그는 동생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지 알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왔다.
진행
소음에 놀란 심장이 여전히 급하게 뛰었다.
진행
그는 마임의 방 앞에서 잠시 멈췄다. 소음의 흔적 없이 방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에밀
괜찮아…?
진행
문 너머를 향해 말을 걸고 두어번 노크도 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진행
귀를 대보아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는 조심스럽게 문 손잡이를 돌렸다.
진행
방 안의 풍경이 그를 덮쳤다. 바닥 곳곳에 떨어진 물건들이 있었다.
진행
난잡의 한가운데에 있는 자신의 동생과 마주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진행
에밀은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 중에 비릿한 향이 섞여 있었다. 그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향이다.
진행
그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방은 어두웠고 떨어진 물건들 때문에 바닥이 흥건하다는 걸 그제야 발견했다.
에밀
…
진행
마임의 피가 그의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진행
상황의 이해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에밀은 곧장 달려가 무릎을 꿇고 그의 팔을 감싸쥐었다.
에밀
괜찮아…. 괜찮아질거야, 이것부터…
진행
혼란함이 정신을 지배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자신이 어떤 말을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본능처럼 상처를 틀어막았다. 에밀의 손과 옷소매까지 피로 젖어갔다.
진행
마임은 떨리는 손으로 중얼거리는 그를 조용히 보다 속삭였다.
마임
하지마.
진행
에밀은 그 말을 제대로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마임이 빠르게 그의 손에서 자신의 팔을 빼냈다.
진행
팔에서 줄줄 흐르던 피는 어느새 바짝 말랐으며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그 위로 문신이 드러났다.
진행
방 안에는 숨소리만 들렸다.
진행
에밀은 상황을 이해하거나 판단할 수 없었다. 애써 눌러왔던 공포는 이미 그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고 짧은 호흡을 불규칙하게 내뱉었다.
진행
마임은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진행
정돈되지 않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와서 도망치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이런 걸 원한 적 없었다.
진행
에밀은 무너진 물건과 잔혈 속에서 그저 숨을 몰아쉬었다. 아주 조금만 움직여도 시야가 어지럽게 망가졌다.
진행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시간이 몇 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진행
버석버석 마른 비명이 새어나왔다.
진행
바닥을 타고 약한 진동이 울렸다. 에밀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행
진동이 이어졌다. 흐린 시야에 아주 옅은 빛이 보였다. 그것을 향해 절박하게 몸을 움직였다.
진행
기어가다 싶은 움직임이었지만 다행히 도달하기 전까지도 진동은 이어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진행
휴대폰이다. 진동이 손끝을 찌르 듯 울렸고, 그가 화면을 마구잡이로 누르자 진동이 멈췄다.
진행
짧은 정적. 끊어진 게 아닌지를 의심하던 찰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오
…여보세요?
에밀
형…
안토니오
…에밀?
진행
익숙한 목소리였으나 현실 같지 않았다.
안토니오
왜 너가…
에밀
몰라. 어,어떻게 해야 되지…
진행
울음과 숨이 한꺼번에 터졌다. 휴대폰 너머에서 목소리 대신 발소리가 들려왔다.
진행
저택 안의 공기가 싸늘했다.
진행
하지(夏至) 1부 종료
진행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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